본문 바로가기

닥빈 서사 쪽

닥빈 - 노래

유난히 오늘따라 관리해도 될 것이 적었다. 지구에 위협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늘 웡과 함께, 혹은 따로 외계의 위협을 감시하고 느슨해진 보호막을 재설계하고를 반복했다. 오늘 느껴지는 결계의 충돌은 없고, 특별히 지구를 위협하는 것의 기운이나 형태 등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인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는 우주의 위협으로 지구가 위험에 처하진 않을 확신이 생겼다.
대신 생텀의 있는 것을 감시해야 했다. 이곳에 발을 들인 지 이제 3주쯤 되어가는 것. 방 밖으로 나온 지는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것이 무슨 짓을 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보아하니 대충 생텀 안을 청소하고 지정된 곳을 돌아다니는 것뿐인데, 남은 많은 시간 동안 무얼 하는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늘 생텀으로 돌아오는, 지정된 시간에 맞춰, 그것은 방 안에 들어가 있었을 뿐이었다.

 

 

마법사는 투명한 막을 지나 뉴욕 생텀으로 간다. 소리 없이 발을 옮겨 생텀의 2층, 왼편에 소리도 없이 발을 딛는다. 시끄러운 바깥의 소음이 아니면 언제나 정적뿐이었던 생텀에서 오늘은 선명한 소리가 들린다. 노랫소리가 들린다. 마법사는 가만히 있다.
익숙한 듯 다른 목소리. 가사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인지(認知)할 수 없는 노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위치는 2층 로비, 창가에서 약간 떨어지고 계단에 더 가까운 곳. 소리의 근원지는 햇살을 받으며 계단 난간에 아슬하게 앉아있는 것.
악기는 결코 인간의 목소리를 완전히 따라 할 수 없고, 인간 또한 악기의 소리를 완전히 따라 할 수 없음을 닥터 스트레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달랐다. 빈이라는 이름의 외계인이 부르는 것은 들을 순 있되 감히 인간의 악기로 따라 할 순 없는 것이었다. 많은 세상의 노래들 집합체에 가까운 그가 부르는 음은 정신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웠다. 세이렌이라는 존재가 부르던 노래가 저런 것이라면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 순간 홀리는 선원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것에게 마법이라는 존재가 그렇다면, 이 순간에는 마법사에게 노래가 그런 존재였다. 가볍게 눈을 꾹 눌러 소리의 매혹을 떨쳐내고 보이는 것을 응시한다. 그제야 다시 보인다. 계단 난간에 위태롭게 앉아서, 다리를 가볍게 둥둥거리고,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이 세상에 흩어지는 다시 오지 않을 음을 외우는 저 생명을.

 

 

 

 

비어있는 시간에는 늘 노래를 불렀다. 수많은 곳을 오가며 셀 수 없는 양의 노래를 들었고 끔찍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뒤섞여, 이제는 오로지 나의 것이 된 노래를. 한 번 뱉으면 돌아오지 않을 음절과 멜로디, 선율을 뱉는다. 그 무엇도 따라 할 수 없는 것을, 기록할 수도 없는 것을 뱉노라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들이 있다. 내 안은 더 비워져 공허로 가득함에도 이것들이라도 이리 뱉지 않으면 뱉을 방법이 없다. 내가 알고 내가 얻어온 것들은 모두 다른 차원의 것이라 노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기괴한 눈초리를 받게 하는데 노래가 아니면 무엇도 뱉을 수 없지 않나. 터져 죽거나, 아니면 공허하게 늘 살아가거나. 차라리 허무를 택하게 하는 시간은 참 잔인하다.

그리하여 몸을 비우는 동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를 유지한다. 아주 작은 기쁨이라도 붙잡아 발끝 자락이라도 채우기 위하여. 이곳, 생텀에는 큰 창이 있다. 햇볕이 참 잘 들어오는 창. 그 앞에, 앞에, 앞에. 떨어진 계단 난간에도 햇볕이 닿는 시간에 빛을 등지고 난간 위에 앉는다. 무게중심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고 발을 동동 굴리는 것으로 움직이는 몸이 떨어지지 않게 유지하기도 쉬웠다. 등으로 받는 햇볕은 따스하고 발아래 무엇도 없는 떠있는 감각은 나쁘지 않다. 자유를 느끼는 것만 같은 착각. 눈을 감으면 배(倍)가 되는 그 감각이 간지럽다. 자유롭다는 착각에서, 몸 안을 간질이는 그 감각에서 작은 미소가 피어난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빈은 노래를 멈춘다. 천천히 잦아든 노래는 자연스러웠지만, 그는 고갤 갸웃인다. 이상한 점을 느낀 것인지 눈을 뜨고, 문득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오늘의 다른 점을 찾아낸다. 붉은 망토의 마법사. 바람이 불지 않지만 약간씩 끝을 흔드는 망토는 음을 타는 듯이 보인다. 빈의 동그랗게 떠진 노란 눈이 곧이어 접히더니 머쓱한지 시선을 피해 웃는다.
언제부터 있었어요? 한 1분 정도. 왔으면 인기척을 내는 게 어때요? 내가 왜? 부끄러우니까요! 가볍게 코웃음 치며 마법사는 넘어가 버리고 이제야 인기척을 내며 생텀의 계단을 내려간다. 여전히 난간 위에서 눈으로 그를 좇던 빈은 그의 등 뒤로 눈을 가늘게 떠 흘겨보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는 모습에 빙긋 웃어 보인다. 헛짓거리하지 마. 내가 뭘 했다고요? 째려보기라든지. …혹시 등 뒤에 눈 달렸어요? 알려줄 이윤 없지. 뭐예요, 그 발언? 진짜 없는 거 맞죠? 가볍게 그의 물음은 또 묵살된다.

 

차?

네?

차 마실 거냐 물어보는 거야. 아니면 핫초코라도 내주지.

음, 나도 차 마실래요. 닥터랑 같은 거. 어떻게 만들어요?

차는 우려낸다 하는 거야.

 

아. 작은 끊김 사이, 빈은 작게 알겠다는 듯한 의성어를 낸다. 동시에 난간 위에 앉아있던 것, 우주의 생명 중 하나가 마법사를 따라 계단을 내려간다. 마법사는 벽난로 앞에 자리한 탁자에 앉으라고 눈짓을 보냈고 그를 알아들은 생명체는 자리를 찾아간다. 갑자기 차를 준다는 게 그에겐 뜬금없이 다가오기라도 했는지 자리에 앉아 그저 맹한 얼굴로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마법사는 작은 불꽃을 틔우고 물을 데우는 방법을 알려준다. 커피포트라는 것의 생김새와 사용법을 알려준다. 어떤 공간이 있음을 가정하고, 찻잎의 위치, 찻주전자와 찻잔의 위치 등을 알려준다. 갑작스러운 설명, 남이 보면 부자연스러운 흐름을 인간이 아닌 생명은 쉽게도 따라간다. 갑작스러운 설명에도 똑바로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지막으로 닥터 스트레인지가 가볍게 손을 휘, 저었다. 그리고 어느 공간을 알려준다. 로비의 문에서 왼쪽 복도로 가다 보면 이제는 보일 거라는 나무문 하나. 아무 무늬 없는 그곳에 간이 부엌이 있다고. 그곳의 구조는 방금 설명한 것과 같다고 한다.

빈은 그것이 허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들어갈 수 없는 공간에 대한 허락. 맹했던 얼굴이 말간 웃음을 지으면서 고갤 끄덕인다. 마음대로 써도 돼요? 엉망으로 만들어놓으면 네가 다 정리할 것, 태우는 순간 출입금지다. 그런 것쯤이야. 고마워요, 닥터!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마법사는 그의 반대편에 앉는다. 그리고 어느새 따스한 온도의 차와 가볍게 먹기 좋은 다과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먼저 차를 넘긴 마법사가 입을 연다. 오랜만에 뭘 봤는지 이야기나 듣지.

 

 

 

 

어떻게 만들어요?

차는 우려낸다하는 거야.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그 어색한 말을 바꿔줄 이유는 없었다. 그는 그저 손짓 한 번이면 핫초코든, 차든, 맥주든 한 번에 채우고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만든다는 말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정적 동안 참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 여전히 난간에 앉아있는 그것을 보았다. 연한 색소의 머리와 진한 색이라곤 눈의 십자 동공밖에 없는 것. 햇빛을 등으로 받아 역광으로 그림자로 뒤덮인 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의문이 들었다. 어떤 연유에서 쉽게 떠날 수 있는 이곳을 그는 떠나지 않는가.

이유는 알 수 없다. 얘기하지 않은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고 늘 간접적인 것으로 힌트만 주는 불친절한 것. 오랜 시간 동안 세상을 전전해 왔으니 당연하겠지만 대부분 세상에서 그가 만난 이들이 그 단서를 알아채기란 어려웠을 터였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내비치는 단서들을 알아내는 이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까지 미쳤다.
저 생명은 차를 원하면 항상 자신을 불러서 차를 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고 직접 만드는 것을 물어보는 저 태도. 저 태도가 오래간 이곳에 머물 거라는 암시를 내비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자신이 떠나고 싶을 때가 오기 전까진 이곳에서 버티고 있을 외계의 생명에게 속으로 한숨을 쉬고, 부디 저것이 애 같지 않기를 바랐다. 벌써 이런 걱정이 든다는 점에서 그른 것 같지만.

가벼운 눈짓만으로 그 속뜻을 알아채고 자리에 앉는 모습으로 그가 눈치가 없진 않다는 걸 알았다. 갑작스러운 설명에도 자세히 귀를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저 생명은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흐름을 살아왔으니 이 정도는 자연스럽기 그지없을 수도 있었다. 그런 것에게 잘 쓰지 않는 간이 부엌을 알려주는 것은 정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얄팍한 동정심에 가까웠다. 신뢰 자체를 쌓기 어려운 삶을 살아왔기에 늘 자신의 저의를 알아주길 바라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생명의 기적과 고통스러운 인내의 시간을 안다는 것은 가끔 이런 변덕을 일으키곤 했다. 그것에 대해 후회하느냐 하면 약간은. 하지만 보름간의 얇은 신뢰, 3주가 되어가는 그에 대한 신뢰는 이 정도를 허락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 되었다.

 


 

'닥빈 서사 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닥빈 - 보름  (0) 2022.02.05
닥빈 - 기록에 대하여  (0) 2022.02.02
닥빈 - 마법의 오류?  (0) 2022.01.22
닥빈 - 범죄자  (0) 20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