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고 햇볕이 옅게 드는 곳에서 기이한 편안함을 느낀다. 하루에 한 번. 창문의 그림자가 온전히 문에 들어맞으면 빨간 망토를 맨 마법사가 들어온다. 하지만 노크도 없이.
오늘로 보름째.
…
첫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눈을 마주하고 무거운 침묵만을 유지했다.
둘째날은 입을 조금 달싹였다. 그뿐이었다. 어떤 말이라도 뱉어야 하나 라는 고민은 머릿속에만 있었다. 물이 채워지는 물컵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역시나 마법사는 말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물을 마셨는데 얼마나 쥐고 있었는지 미지근해져 목을 부드럽게 넘어갔다.
셋째날에서야 이름을 말했다. 하루를 꼬박 고민하여 겨우 내뱉었다. 그것도 마법사가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야. 빈, 내 이름이에요. 말을 안 했더니 텁텁하게 잠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마른기침을 하며 급히 물을 들이켰다. 다시 물컵이 채워지는 광경은 여전히 신기했다.
넷째 날에는 이름을 물어봤다. 마법사 씨의 이름은 뭐예요? 마법사는 말이 없었다. 그저 눈을 마주할 뿐이었다. 나도 가만히 있었다. 전처럼 괜한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가 나에게 말을 재촉하지 않은 며칠처럼 그저 가만히 있었다. 또다시 문손잡이에 그림자가 닿았다. 마법사는 떠나기 전에 이름을 말했다. 닥터 스트레인지.
다섯째 날에는 그가 들어오는 시간을 알았다. 시간도 알 수 없는 좁은 공간. 창문의 그림자로 시간을 가늠하는 곳. 창문의 그림자가 온전히 문에 들어맞을 때 항상 마법사는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했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눈썹이 살짝 까딱였다. 그리고 늘 그렇듯 가만히 눈을 마주했다. 뭘 바라는 걸까. 나도 마주했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그저 가만히.
여섯째 날에도 인사를 건넸다. 음식도 항상 고마워요. 덧붙였다. 역시나 말이 없었고 다시 고요함만 자리했다.
일주일이 되는 날, 인사를 했다. 딱히 반갑진 않아.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살짝 놀란 눈을 깜빡이다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그날 전부였다. 이제는 당연한 듯이 마주했다. 그리고 관찰했다. 그의 옆머리는 하얀색으로 되어있었고 뒤로 넘긴 머리였다. 그는 항상 노란 장갑을 끼고 있었고 어깨에 있는 망토는 자아를 가진 듯이 움직였었지. 그가 나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날, 그가 방을 나서는 시각을 알았다. 문에 들어맞았던 그림자가 손잡이에 닿는 순간이었다.
…
일주일이 넘어간 지 첫날, 팔 일째. 그는 여전히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늘은 대답이 없었다. 말없이 관찰하는 것은 어제 하루 했지만 그만두었다. 그를 관찰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니 그가 이때까지 나를 관찰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물로 목을 축였다. 아, 아. 살짝 갈라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걸었다. 닥터 스트레인지, 여긴 어디인가요?
구 일째, 인사를 하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별다른 대꾸 없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내가 아닌 마법사가 질문했다. 너는 누구지? 물로 목을 축였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이내 다시 눈을 마주했다. 이름은 빈. 이 세계 사람은 아닌 생물. 기록이 남지 않는 것. 이동 조건은, 목걸이. 목에 걸린 푸른 목걸이를 꺼내고 풀어서 건냈다. 이거에 대해서 알아요? 알려줄래요? 나도 잘은 몰라서. 노란 장갑 위에 푸른 목걸이가 올라갔다. 금빛 줄에 매달린 푸른 보석은 햇볕에 빛났다. 그는 목걸이를 가져갔다. 이날은 잠깐, 해방감을 느꼈다.
십일째. 안녕하세요, 인사와 동시에 제 목에 다시 걸린 목걸이를 보여줬다. 기이한 물건이군. 뭐 좀 알아내셨나요? 전혀. 어쩐지 씁쓸한 맛이 목을 넘어갔다. 타는 목에 물을 꼴깍꼴깍 삼켰다. 더 볼래요? 하루면 나한테 돌아오긴 하지만. 네 의지는 아닌가 보지. 하하. 무미건조한 웃음을 뱉을 뿐이었다. 다시 목걸이를 풀어서 노란 장갑 위에 올렸다.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그냥, 목걸이나 나나? 이 우주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 그러니 네 존재가 우주의 관점에서는 놀라운 게 아니지. 물론 마법이 깨지는 건 예상치 못했다만. 눈앞에서 마법으로 푸른 목걸이를 이리저리 다뤄보는 마법사가 말했다. 잠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대신 무언가를 털어내는 웃음을 내었다.
십일 일째. 좋은 날 같아요, 그쵸? 글쎄, 모르겠군. 왜 웃지? 덕분에 좀 편해져서요. 뭐가? 그런 게 있어요…가 아니라! 습관처럼 넘기려는 걸 막았다. 가볍게 박수를 짝, 치고 느리게 웃었다. 눈도 함께. 그냥, 나도 우주에 속한 존재인 거 같아서요. 닥터 스트레인지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 우주에 속하지 않은 존재는 없어. 기록이 없을지언정? 아니, 기록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지만 마법이 통하지 않았잖아요. 마법은 통했어. 그럼 왜? 다른 세상에선 잊혔으니 기록이 없겠지만 여기는 아니므로. 널 인식하는 존재는 지금도 계속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지. 이런 대화로, 관찰로 너는 기록되고 있단 거야. 그럼 내가 이동되지 않은 건 기록된 곳이 이곳이기 때문에? 정답.
십이일째. 밖은 어때요? 그런 게 궁금한가? 나는 나갈 수 없으니까요.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 시간이 변하는 하늘뿐이고. 이곳은 어떤 곳인가요? 모두가 닥터와 같나요? 많은 질문을 했다. 실없이 많은 것들을 질문했다. 닥터도 나에게 질문을 했다. 내가 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의 질문이었지만 내가 질문한 만큼, 나는 답했다.
십삼일째에도 질문을 하고, 받고 답했다. 너무 딱딱하지 않아요? 무엇이. 그냥 이렇게 말만 하는 거요? 이미 네 말엔 수많은 과장이 들어가 있을 텐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너 같은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라. 차원을 이동하는 다른 생명을 봤어요? 그런 의미가 아니야. 너같은 성격의 말 많은 것들을 봤다는 거지. 아하아…? 그래도 다 진실인데요! 그래, 알고 있어. 전혀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닌데.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군. 저기요?
십사 일째인 어제도 이야기했다. 여전히 내 쪽에서 수많은 말을 하고 영양가 없는 티키타카를 잇기도 했다. 이따금 받아쳐 주는 것에 킥킥대며 웃기도 하며 이젠 침묵 대신 말소리로 방을 채웠다. 내 말을 다 하면 마법사가 말을 했고, 다음엔 또 나, 다음은 또 닥터. 그렇게 지나가는 듯한 날에, 유리컵을 깼다. 단순히 물을 마시려 하다 컵이 손에서 미끄러졌고, 말을 하던 닥터의 말도 끊겨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당황하여 말을 잃었고 마법사는 글쎄. 깨진 조각들에 눈을 주고 있어 알 수 없었다. 미안해요, 고의가 아니에요. 하던 말이 뭐였어요? 허리를 굽혀 컵 조각을 주우려 할 때 다시 몸이 펴지고 깨진 유리조각들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새 유리컵을 받았다. 무슨 생각으로 깨진 조각을 주우려 하는지 모르겠군. 상처가 나지 않는 신체인가? 비난의 어조도, 조롱의 투도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일상의 어투. 음, 그건 아니지만요. 내가 깨뜨렸으니까 내가 치우는 게 맞지 않아요? 손으로 주워서 피가 나면 또 처치하는 건 내 몫이야. 도구 없이는 함부로 건들지 마. 이런 건 알 텐데. 알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말해. 그래도, 좀. 내 실수인데 내가 하는 게 없으니까요? 침입자의 특권이라 생각하던지. 예? 시간이 다 됐군. 저기, 저기요? 닥터 스트레인지? 내일 또 오지.
오늘. 보름째. 오늘은 좀 날이 좋은 거 같던데. 아니에요? 나름. 오늘은 저 작은 창으로도 유난히 빛이 밝더라고요. 조잘조잘. 이 좁은 방에 관해 실없는 이야기를 하다 문득, 그런데요. 뭐지? 난 여기 언제까지 있어요?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면- 아뇨, 그 뜻이 아니라요. 이 방에서요. 방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소리예요. 네가 뭔 짓을 할지 어떻게 알고. 보름간의 신뢰를 믿고? 있을 거라 생각하나? 첫 만남보단 생기지 않았을까요? 방금 그 발언으로 줄어들었어. 앗. 마법사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위험성을 완전히 파악할 때까진 안 돼. 지금까지 봤을 때는 어떤데요? 위험성은 딱히 느껴지지 않지만 속을 알 수 없는 것. 마법이 통할지도 제대로 모르니 감시할 마법을 쓰기도 어려운 존재가 너야. 엥, 괜찮은데요? 뭐가? 마법이요! 어떤 종족일지도 모르는 것한테 인간한테 쓰이는 것이 들어맞으리라는 확신이라도 있나? 여러 차원을 다니면서 내가 항상 이 모습일 거라 생각해요? 내가 인간만 있는 곳에 다녔다고 생각해요? …이동하는 곳마다 어울리는 외관과 습성으로 바뀐다는 소리군. 정답! 그래서 여기에 있는 나는 인간한테 쓰이는 마법이 통한다! 진작 얘기하지. 중요한 건 줄 몰랐죠?
…
닥터가 가볍게 손가락을 두들긴다. 무언갈 생각하는 듯이, 눈은 마주했지만 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차가운 눈, 모든 것을 담은 우주기에 모든 것에게 공평한 잔인함을 선사할 것만 같은 눈. 그 무관심한 눈빛 아래서 안온함을 느낀다. 객관적인 판단하에 다시금 나의 위험성을 확인하는 눈빛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주홍빛의 마법 진이 발아래서 빛난다. 가볍게 몸을 훑고 지나간 것이 하나의 종이처럼 변하더니 그에게로 날아간다. 어떠한 정보가 적힌 종이는 나에겐 그저 백지로 보일 뿐이었다. 모호한 눈으로 잠깐의 고민을 담은 숨을 뱉더니 그림 같은 단어들로 내 목을 두른다. 사고 치면 다시 넣을 거다. 어라, 다 끝났어요? 그래, 네가 지금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면 나에게 신호가 올테니 허튼짓은 하지 마. 예를 들어서? 남을 해치는 행위. 아하. 그럼… 방 밖으로 가도 돼요? 유물이 있으니 함부로 만지지 말 것. 막힌 곳은 마음대로 들어가지 말고. 할 게 없으면 청소라도 하던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고갤 끄덕인다. 나가는 마법사를 따라서 방 밖으로 처음 발을 내딛어본다. 커다란 실내, 균형을 이룬 계단. 전시되어있는 복잡한 문양의 도구들. 닥터가 입고 있던 옷의 끝자락이 내게 인사하듯 흔들린다. 침입자로서의 긍정적인 인정이려나. 아무 느낌도 들지 않고 거울로도 목에 문양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속에 감춰진 것이겠지. 느리게 발을 옮기며 생텀의 중앙, 커다랗고 동그란 창 앞에 섰다. 곡선들이 비틀어진 균형을 이루며 그림자를 만들어낸 곳. 방에 난 창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것.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똑똑히 본다. 여러 소통의 소음이 귀에 박히고 집중할수록 들리는 여러 소리들.
…
부수지 마라. 깜짝아! 창문 보수공사는 귀찮아. 안 부숴요. 부술 수도 없어 보이는데요 뭘. 그럼 뭘 보고 있지? 바깥이요. 사람들이요. 서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어요. 저런 게 재밌나? 서로 소통할 거리가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요. 우리의 소통거리는 "침입자"라는 건데 그것도 좋아하겠군. 그럼요! 무척 이요. 꽤 즐거워요. 취향이 이상하다는 건 처음 알았는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내가 차원이동자란 걸 누가 믿겠어요, 미친 사람 취급이나 할 걸요? 그래서 그냥~… 말 안 하고 다녔는데 닥터는 바로 알아냈으니까요. 나는 편하고 좋은 거죠! 나 같은 존재가 처음인가? 그건 아닐 걸요? 근데 기억은 안 나요. 아마 도망쳤나? 아니면 날 죽였나? 모호해요. 어쨌든 닥터같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봐도 무방하죠! 영광으로 받아들이라고요. 뭐, 생각해보지. 이런 기회 흔치 않아요, 좋게 생각해보라고요. 닥터는 보통 어디에 있어요? 여기 아니면 다른 곳. 그걸 말이라고 해요? 네 존재를 아직 완전히 믿을 순 없으니까. 뭐, 맞긴 하지만 조금 어이없는 건 알아요? 네가 현실을 지키는 일을 해보지그래? 예에, 예. 제가 무슨 말을 하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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