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는 것 같아서 다시 말해주도록 하지. 넌 범죄자의 신분이야.
닥터 스티븐 스트레인지는 그렇게 말한다. 잠시 바닥을 내려보던 빈은 아무 말 없이 허리를 편다. 엉망인 자세를 바로잡고 고개를 들어 십자 동공으로 그를 마주한다. 그리고 알 수 없게 입꼬릴 올려 웃을 뿐이다. 황금빛 눈은 충분히 밝음에도 감옥의 진 그림자 탓일까, 무거운 느낌을 추가할 뿐이었다.
닥터는 생각한다. 이곳에서, 좁은 감옥에서, 내보내달라고는 못할망정 되려 담요, 방석, 음식, 먹을 걸 달라는 등의 이런 곳이 익숙하다는 듯한 태도를. 그가 위협적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가벼운 언사에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그런데 이 분위기는 뭐지? 깊은 눈에 그림자가 진다. 닥터는 한 걸음 물러난다. 떨리는 손은 언제나 마법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있었다. 어깨의 레비테이션 망토도 어느 순간 잠잠하며 감옥에는 검은 침묵만이 맴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떨리는 손이 그의 손이란 것을 잊을 만큼 눈앞의 위험인물에 집중한다.
빈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입꼬리는 여전히 올린 채로, 검은 십자 동공을 고정한 채로. 한 걸음 멀어진 닥터를 본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스스로 맞잡은 손이 차갑다.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다. 천천히 입꼬리가 내려가고, 아주 살짝만 다시 올린다. 그의 금안은 감옥 그림자가 무관할 만큼의 생기를 품는다. 늘 그래왔던 표정으로, 늘 그랬던 목소리로,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산만한 태도로. 방금의 대치상황이 무색할 만큼.
알겠어요, 알고 있어요. 난 되게 의심스러운 사람이란 거! 근데 어떡해야 의심을 덜어낼 수 있을지를 모르니까~ 난 나름대로 이 좁은 곳에서 얌전히, 필요한 것만 달라고 부탁하는 것뿐인 걸요. 갇힌 게 억울하긴 하지만 오히려 나가게 해달라고하면 더 이상해 보이지 않나? 무슨 목적이 있는 거 같아 보이고.
… …
아이, 왜 말이 없어요?
정말 몰라서 묻나?
아이, 참. …내가 원한다고 온 것도 아닌데 범죄자 취급이라서 좀 어? 분위기 좀 잡아봤어요. 억울해서!
그게 더 의심을 살 거라는 생각은 안 했나보지?
그 쪽 기대에 한 번 맞춰봤네요! …그치만 너무 억울하니까요. 난 진짜, 여기 올 생각 없었다고요. 그냥 두통이 심하게 왔고 골목에서 잠깐 쉬고 있는데 순간 몸에 힘을 잃고… 정신을 차리니까 당신이랑, 다른 마법사 씨를 본 것 뿐이에요.
그의 말을 끝으로 스트레인지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아까의 분위기는 신기루였다는 듯이 흩트린 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뒤로 돌아 감옥을 빠져나갔을 뿐이었다.
저 말이 진실일까. 아니, 애초에 들을 필요도 없지. 저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도는 많지만, 저 말 많은 침입자를 돌려보낼 방법을 찾으면 상관없을 테니 그건 중요치 않았다. 전에 지내던 곳을 그리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아하니 돌아갈 곳은 딱히 없어 보이는데, 그게 무단 침입의 합리성을 부여해주진 못하니까. 정말로 저 치가 이곳에 우연히 왔다 하더라도 언제 이곳을 파괴할지. 우주의 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책들이 쌓인 방으로 들어가 책을 골라낸다. 차원 이동, 이전의 머물렀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마법을 찾아서.
…
붉은 망토의 마법사가 나간다. 그대로 발라당 누워 푹신한 베개에 눕는다. 담요를 덮었어도 바닥은 차고 등은 아프다. 따듯하다고는 할 수 없는 옥 안 공기를 들이마시고 속에서 데워진 뜨거운 공기를 가득 내뱉는다.
-잊고 있는 것 같아서 다시 말해주도록 하지. 넌 범죄자의 신분이야.
와, 범죄자라. 그럼요, 그럼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행성에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무단침입한 인간의 형태를 한, 알 수 없는 외계인. 이게 그쪽이 날 생각하는 그 정도 감상이려나요? 깊은 눈에 그림자가 진 채로 언제든 제게 마법을 쓰려 하는 마법사를 생각한다. 그치마안, 서러운 건 어쩔 수 없는데. 몸을 빙글 돌려 벽을 본다. 그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당연한 태도니까. 그저 전에, 아주 극악의 확률로 너무나 친절한 사람을 만나서 괜히 따스함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딱딱한 돌바닥은 덜 차가워진다고 느낄 뿐 따스해지지는 않는다. 깊은숨을 내쉰다. 십자 동공이 이러지는 듯싶다가 꾹 감아버리고 그저 덮은 담요를 더 꼼꼼히 둘러싸고 생각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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